경주 향가 문학기행 일정
헌강왕릉(처용가)---서출지-- 사천왕사터(월명리 경덕왕때 월명사가 지은 향가 제망매가 도솔가 )--선덕여왕릉(知機三事일화)--괘릉--원성왕(영재가 지은 향가 우적가)
월성(반월성) 원효의 沒柯斧歌 -- 계림 (김알지의 탄강)-- 충담사의 안민가
사적 187호 49대 헌강왕릉 경문왕의 장자이며 본명은 김정
삼국사기에는 886년 7월 죽자 시로를 헌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있다
이 왕릉은 도굴되었다 1993년 우기에 정상부가 붕괴되자
복원 정비를 위하여 현실 내부및 왕릉 내부에 다시 조사가 있었다
그때 나온 유물은 고무 다라이 소주병 면장갑 등 도굴꾼들이 쓰다 남은 물건이 전부였다
1,헌강왕릉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에 실려 전하는 작품이다
신라 제 49대 헌강왕이 開雲浦(지금의 울산)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동해용의 종화라는 일관의 말을 듣고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했다
그러자 바로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동해용의 아들 처용이 왕을 따라 서울로 가서 왕의 정사를 도왔다
왕은 처용에게 아름다운 아내와 금간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역신이 아내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여 그이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는데
처용이 이를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역신이 처용 앞에 끊어 앉아 지금부터는 처용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며 물러났다고 한다 그때 처용이 부른 노래가 처용가이다
“서울 밝은 달에/밤 깊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
둘은 내 해거니와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다 내 해였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의 근원적 심성인 관용의 미덕을 풀어 낸 것이다
관용으로 원한 해소함은 투쟁으로 문제를 해결함보다
한 차원높은 삶의 자세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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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서출지
신라때부터 내려오는 저수지로서 제21대 소지왕의 전설과 관계가 있다
신라 소지왕이 488년 남산 기슭에 있었던 천천정에 거동하였을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그 중 쥐가 사람의 말로써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쫒아 가보라"라고 하므로
괴이하게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가 보게 하였다
신하는 이 못가에 와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주므로 왕에게 그 봉투를 올렸다
이 봉투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말을 듣고 왕께 고하나
왕은 봉투를 열어보지 않기로 하자
신하는 "한 사람은 바로 왕이 옵니다"라고 말을 하자
왕은 봉투를 열어 봉투 속에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거문고갑을 쏘게하니 왕실에서 분향하는
중이 궁주와 서로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궁중의 간계를 막았다는 듯에서
못 이름을 서출지라 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음력 1월 15일
까마귀에 제사밥을 주는 오기일의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3.사천왕사터(월명리) 경덕왕 때 월명사가 지은 향가 제망매가와 도솔가
사적 8호 낭산 남동쪽 기슭에 있으며 망덕사지의 북서쪽 약 300m지점에 있다.
여기에 2수의 목없는 귀부가 있고 서쪽 7번 국도변에 당간지주가 서 있다
사찰은 동서로 대부분의 초석을 남긴 사방 3칸의 탑지가 있고
그 북쪽에 완전하게 초석이 남아 있는 금당지金當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쌍탑식 가람배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금당지 북쪽에 동서로
다시 사방 3칸의 작은 건물 기단이 있어 특수한 배치를 한 사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금당 북쪽의 건축은 좌우 경루(經樓) 와 종루鐘樓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절터에서 출토된 와당과 무뉘 전석 특히 녹유사천왕상전 등은 매우 정교하여
당시 국가가 종력을 기울여 세운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문호왕법민조에 기록된 사천왕사 건립설화를 보면
삼국통일직후인 679년 에 창건되었으며
길 건너 망덕사보다 5년 앞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675년 나라는 설방을 장수로 삼아 50만 대군으로 신라에 침공해 왔는데
이를 막기 위하여 이곳에 채백彩帛으로 가사를 만들고 초목으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명랑법사가 12명의 명승과 함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자
교전도 하기 전에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으므로
이곳에 사천왕사를 짓고 국가의 진호를 위한 국찰國刹로 삼았다고 한다
4.괘릉
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왕의 유해를 연못의 수면 위에 걸어 장사를 지냈다는 속설에 의해
걸꽤자를 써서 괘릉이라 하며 흔히 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괘릉은 무엇보다도 무덤 앞의 무인석 한쌍이 지키고 있었다
신라와 아라비아 와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슬람 상인들이 이미 산라에 들어와 교류하였으며
일부 신라에 정착하여 무인으로 높은 벼슬에까지 오르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인석은 처용가의 처용이 서역인이라는 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
삼국유사 영재우적조에 실려 전하는 작품이다
영재가 남악에 은거하러 가던길에 도둑을 만났다
도둑은 칼을 영재의 목에 대고 위헙을 했으나 두려워하는 빛이 없자
그 이름을 물었다 평소 영재의 이름을 들은 바 있는 도둑은 영재에게 노래를 지으라고 명했다
노래를 들은 도둑은 크게 감동하여 비단 2필을 주었으나 영재는 거절했다
도둑은 이에 감동하여 칼을 버리고 머리를 깎고 영재의 따라 지리산에 들어간 뒤 다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빠진 글자가 있으나 해독한 가사 내용입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 속 세속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깊은 산중으로 수도하러 가는 수도승이다 /
너희들 칼에 내가 찔림을 받으면 좋은 날이 바로 올 것이라 슬플 것이 없지만 /
아직도 정진해야 할 길은 멀리 남아 있는데 그렇게 무참히 명을 끊을 수 있겠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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