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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소식

2011.9.24 한국문화사 남도문화탐방 6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1762~1836)

 

정약용 일생은 3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벼슬살이 할때 편하게 지낸것을 말한다면

2기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라고 볼수 있으며

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라고 본다

 

조선후기에 중농주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선생은 기예론을 통해서

기술을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해서 청의 기술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유배지에서 저술 활동을 통해서 실학을 집대성 하였고 토지제도로는 여전제를 주장하였다 

나라의 관리로써 훌륭했고 학자로써 뛰어난 학문을 가져고 자녀의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약용은 전통적으로 중농학파였다

즉 농사를 중시하는 학자였는데 북학파라고 불리는 중상학파 또는 포용하였다

결국과적으로 당시 실학을 모두 수용하므로 그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서학연구 및 한국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과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저서에는 정다산전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매씨서평. 상서고훈. 상서지원록 .상례사전 .사례가식. 악서고존.  주역심전

 역학제언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 남아 있다

 

23세 이벽으로부터 서학에 관하여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전한다

서학에 심치했던 과거로 인해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했다

20대 초반에 서학에 매혹되었지만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부딪혀 끝내는

 서학에 손을 끊었다고 고백했지만 천주교 관련사건이 일어 날때마다 오해를 받았다      

 

 

 

 

기나긴 유배 생활의 시작은

정약용의 가장 큰 후견인은 정조였다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큰 환란이 없었지만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고난이 시작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정약용도 정조 사후에 완벽히 배제되고 잊혀져갔다

 

1801년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 형인 정약종도 참수를 당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는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 동안 긴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다산 시문집 4권에는 정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정약용의 시가 전해진다

 

자찬묘지명에 따르면 저작은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으로 모두 499권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다

별세할 때까지 15년 동안 온 힘을 기울여 많은 책을 남겼다

아들 정학연은 추사 김정희에게 여우당집의 교열을 부탁했으면

1883년 (고종 20)에는 왕명에 따라 여유당집이 전사되어 내각에 수장되었다

 

 

 

다산선생의 정자에 앉아 잠시나마 외로움과 고독에 취해 보지만

산자락에 앉아 있으니 어둠이 몰려와 서둘러서 내려 온다

같이 움직이는 우리의 우정을 알았는지 기다려 사진을 찍어준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저녁 시간이 7시 30분이 지나자 산에서 부터

어두운 그림자는 서서히 내려온다

그러나  버스 불빛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녁 밥을 먹고

손에 손을 잡고 빙글 빙들 돌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며 ...

가을 정취를 작은 가슴에 가득 담아 오는 발걸음 !

우리만의 아름다운 멋이라고 말하고 싶다